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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5) 중에서 3. 4) 《군대와 인민이 제일 사랑하는 배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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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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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5) 중에서

 

 

3. 선군길을 병사들과 함께

 

4)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안으시고

 

《군대와 인민이 제일 사랑하는 배우였습니다》
 

혁명전사들에 대한 수령의 숭고한 사랑과 의리가 고즈넉이 흐르고있는 애국렬사릉에는 군복을 입은 한 배우의 묘비도 세워져있다.

그가 바로 공훈국가합창단의 관록있는 가수였던 인민배우 석지민이다.

그가 애국렬사릉이라는 영생의 언덕에 오르게 된데는 만사람의 심장을 격동시키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공훈국가합창단 배우 석지민의 사망과 관련한 비보에 접하신것은 주체94(2005)년 11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인민군지휘성원들에게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배우 석지민이 사망하였는데 정말 아까운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는 보기 드문 저음가수로서 우리 군대와 인민이 제일 사랑하는 배우였습니다. 그는 음량도 크고 음색도 특이하였습니다. 노래 〈정일봉의 우뢰소리〉와 같은것은 그만큼 부르는 사람이 없을것입니다.》

충실한 선군나팔수집단의 한 성원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장정을 종군하며 준엄한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함께 돌파해온 미더운 전사, 혁명의 수뇌부의 사상과 의도를 대변하는 힘찬 혁명군가로 천만군민의 심장에 불을 달아주며 선군혁명의 장엄한 총진군을 추동해온 열정의 가수를 잃으신 그이의 안색은 매우 침통하시였다.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속에서 《정일봉의 우뢰소리》, 《대홍단 삼천리》와 같은 노래와 더불어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긴 석지민이 혁명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중태에 빠진것은 20여일전이였다.

전선시찰을 이어가시는 길에서 이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떻게 하나 그를 살려내기 위해 할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해주시였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그의 치료정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며 필요한 대책을 세워주시고 노래로 혁명에 이바지하고 노래로 만사람에게 알려진 그였건만 설사 노래를 못한다 하더라도 생명만 살려낼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자신의 진정을 터놓으신 장군님이시였다.

실로 그이께서 쏟아부으시는 석지민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은 노래에도 있는것처럼 돌우에도 꽃을 피울 위대한 사랑이였다.

국방위원회의 명의로 외국의 이름있는 치료집단도 긴급초청해오도록 하셨건만 끝내 소생하지 못한 전사…

그것이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한 일군에게 그의 한생을 영생의 절정에 빛내여주시려 은정어린 가르치심을 주고 또 주시였다.

인민군대에서 석지민배우의 장례를 잘해줄데 대한 문제, 그의 시신을 서장회관에 안치할데 대한 문제, 석지민의 묘를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쓸데 대한 문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로동신문》과 인민군신문에 석지민의 부고를 잘 내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부고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의 명의로 내야 한다고, 그저 인민무력부라고만 하여서는 당에서 그를 얼마나 중시하였는가 하는것이 잘 알리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뜨거운 어조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석지민에 대한 부고를 낼 때 그가 노래 〈결전의 길로〉의 가사를 비롯하여 좋은 노래가사를 쓴 유명한 창작가 석광희의 아들이라는것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많은 전선부대들을 찾아 혁명적이며 전투적인 노래들을 많이 불러 우리 군인들과 인민들을 조국보위와 사회주의수호전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군인들과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재능있는 인민배우였다는것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순간 일군의 가슴에는 불덩어리같은것이 뭉클 솟구쳐올랐다.

그것은 한 전사의 생애를 더욱 값높이 해주고 부고에 밝혀야 할 내용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는 그 은정에 목이 메여서만이 아니였다.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장병들을 원쑤격멸에로 불러일으킨 명가사들을 써내여 널리 알려진 화선작가의 생이 선군시대의 가수로 한생을 빛내인 아들과 더불어 위대한 선군령장의 심장속에 영원히 새겨짐을 벅찬 흥분속에 절감하게 되기때문이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인민군지휘성원들에게도 석지민의 아버지 석광희는 노래 《결전의 길로》를 비롯하여 좋은 노래가사를 많이 창작한 공로있는 창작가라고, 그가 전화의 불비속에서 지은 노래 《결전의 길로》는 오늘도 우리 군대와 인민을 투쟁과 위훈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고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묘도 아들과 함께 애국렬사릉에 안치하여야 하겠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심장속에 뜨겁게 간직되여 영생의 삶을 받아안게 된 인민배우 석지민.

그가 장군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온 나날들은 그대로 전사들과 최고사령관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의 세계, 동지애의 세계가 얼마나 심원한가 하는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공훈국가합창단성원들 한명한명이 다 그러하지만 그중에서도 석지민은 그야말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나팔수로서 자기의 영예로운 한걸음, 한걸음을 그이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피심속에 긍지높이 새겨온 가수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그가 받아안은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큰것이였는가를 전해주는 이런 가슴뜨거운 이야기가 있다.

주체94(2005)년 2월 어느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공훈국가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하시였다.

그런데 이날의 공연은 뜻밖에도 그이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였다. 전반적인 노래들을 기백이 없이 불렀던것이다.

바로 그날 밤이 퍼그나 깊어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석지민을 친히 곁으로 불러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날 공연에서의 기본결함과 원인을 다시금 지적해주시고나서 교시하시였다.

《지난 시기 공훈국가합창단은 선군시대의 나팔수로서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고 그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공훈국가합창단의 혁명군가를 들으며 현시기 최고사령관이 무엇을 의도하고있으며 무엇을 호소하고있는가를 느끼군 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공훈국가합창단 지휘성원들과 창작가, 예술인들은 이에 대하여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하며 선군시대의 나팔수, 최고사령부의 나팔수로서의 자기의 지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혁명적군인정신이 맥박치는 시대의 합창명곡으로 우리 군대와 인민을 힘있게 불러일으키는것이 바로 공훈국가합창단의 전통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합창단의 책임일군도 아닌 평범한 가수를 불러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모습을 뵈오며 일군들은 그를 선군나팔수집단의 핵심으로 키워가시는 그이의 남다른 보살피심에 무한히 감동되였다.

그러니 장군님 몸가까이에서 그이의 고귀한 지침을 받아안는 석지민의 심정이야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때로부터 며칠후 인민군지휘성원들은 공훈국가합창단 창작가, 예술인들과 함께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국립교향악단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그것은 단순히 관람이라기보다 공훈국가합창단성원들이 합창형상수준을 한계단 더 높이도록 하기 위해 그이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성장과 발전의 중요한 계기였다.

그날 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몇명의 공훈국가합창단 배우들과 함께 석지민을 또다시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공연을 본 공훈국가합창단성원들의 반영이 어떻습니까?》

그이의 물으심에 석지민은 국립교향악단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와 뜨거운 사랑속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고, 연주에서 높은 예술성이 보장되고 특히 지휘를 아주 잘한다는 반영이 제기되고있다고 보고드리였다.

공연을 본 모두의 소감도 그와 다를바 없었다.

《옳소, 오늘 국립교향악단이 공연을 예술성있게 잘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 석지민은 자책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아뢰였다.

오늘공연을 보면서 정월대보름명절공연을 잘하지 못한데 대하여 다시금 돌이켜보았다고, 그리고 공훈국가합창단도 국립교향악단처럼 공연을 높은 수준에서 진행하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최고사령관의 선군나팔수로 내세워주신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반드시 보답하고야말리라는 충정의 맹세가 넘치는 자리였다.

주체94(2005)년 3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날 인민군지휘성원들과 함께 공훈국가합창단의 공연을 또다시 보아주시였다.

공연이 끝나자 그이께서는 대단히 만족해하시였다.

《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이 오늘 공연을 아주 잘하였습니다. 대만족입니다. 전번 공연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댔는데 그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공훈국가합창단이 자기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이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였다.

《동무들 생각엔 어떻습니까.》

《막 힘이 솟습니다. 전번 공연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정말 잘합니다.》

일군들은 저저마다 공연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에 대하여 두서없이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옳다고, 공훈국가합창단이 자기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다시금 치하하시였다. 그러시고 지난 시기 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은 우람차고 위엄있는 혁명군가로 천만군민의 심장에 불을 달아주었고 온 나라를 들었다놓았다고 감회깊이 말씀하시였다.

우람차고 위엄있는 기백과 위풍, 공훈국가합창단은 잃을번 했던 그 얼굴, 그 모습을 되찾은것이다.

그날 밤 합창단의 창작가, 예술인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감회깊은 추억을 더듬으시였다.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 나는 전선시찰을 나갈 때 공훈국가합창단을 직접 데리고 나갔습니다. 공훈국가합창단 성원들이 그때 나를 따라다니느라고 수고를 많이 하였는데 어느 한 부대에 가서는 배우들이 무더위속에서 공연하다가 졸도까지 한적이 있습니다. 공훈국가합창단 성원들은 나의 전선시찰이 얼마나 험준하였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을것입니다.》

장군님의 말씀을 받아안으며 합창단의 창작가, 예술인들은 잊지 못할 그날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그날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뜻깊은 전승절을 최전연장병들과 보내시기 위해 인민군지휘성원들과 공훈국가합창단 성원들을 이끄시고 전선을 찾으시였던 주체86(1997)년 7월 어느날이였다.

그해의 중복날인 이날은 날씨가 너무 무더워 웬만한 사람들은 그냥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더구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인민군장병들과 함께 공훈국가합창단의 전승절경축공연을 보시기로 되여있는 어느 한 부대 군인회관의 관람석은 온도가 너무 올라 숨이 막힐 지경이였다.

그래서 일군들은 그이께 군인회관이 너무 더워 모실수 없다고 간절히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이께서는 그 찌는듯 한 무더위속에서 야전복을 땀으로 흠뻑 적시면서 장병들과 함께 경축공연을 관람하시였다.

바로 그날의 행사공연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공훈국가합창단 성원들은 서로 팔을 끼고 부축해주면서 한시간나마 노래를 불렀는데 합창대에 섰던 한 배우는 장군님께서 공연을 다 보시고 회관에서 나가시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던것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석지민을 만날 때마다 자주 그때의 일을 회고하군 하시였다.

그때마다 그는 듬직하고 말이 적은 자기를 잊고 흥분에 휩싸여 영원히 그날의 정신으로 최고사령관동지의 선군나팔수답게 한생을 빛내갈 결의를 이렇게 굳게 가다듬군 했다.

(내 언제나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장정을 걸음걸음 따르는 영원한 가수가 되리라.)

오직 이 하나의 일념으로 심장을 불태우던 열정의 총아, 순결의 동지가 쓰러졌으니 그이의 쓰리고 아프신 그 심중이 과연 어떠하시였겠는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선군혁명동지의 의리로 영생의 언덕에 석지민과 함께 화선작가였던 그의 아버지도 세워주시였다.

자신께서 몸소 자자구구 내용까지 불러주신 석지민의 사망과 관련한 부고가 당보와 군보를 비롯한 출판물들에 실린 그날,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나는 이번에 석지민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할 때 그의 아버지 석광희도 그 릉에 안치하도록 하였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다시금 뜨겁게 외우시였다.

석광희는 《결전의 길로》와 《수령이시여 명령만 내리시라》를 비롯한 좋은 가사를 쓴 이름있는 작가이다. 그가 조국해방전쟁시기 창작한 가요 《결전의 길로》는 높은 사상성과 호소성으로 하여 정의의 싸움에 떨쳐나선 우리 군대와 인민을 원쑤격멸에로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에 창작된 노래 《수령이시여 명령만 내리시라》도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과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훌륭한 노래이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그러고보면 석광희는 우리 나라 음악사에 자기의 흔적을 뚜렷이 남긴 공로있는 작가라고 말할수 있다고, 사람은 누구나 석광희처럼 사회와 인민앞에 생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제아무리 재부와 권세를 자랑하며 백년을 살았다고 하여도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는 사람은 생을 값있게 보냈다고 말할수 없다고 하시며 이들부자의 생을 값높이 내세워주시였다.

진정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영생의 단상에 오른 화선작가와 가수의 빛나는 삶은 조국과 인민앞에 남기는 생의 흔적이란 어떤것인가 하는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남다른 사랑과 은정속에 뚜렷한 삶의 자욱을 남긴 배우들가운데는 조선인민군4. 25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였던 오미란도 있다.

길지 않은 생의 기간에 예술영화 《축포가 오른다》, 《도라지꽃》, 《생의 흔적》,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을 비롯하여 무려 20여편의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하여 개성적인 연기로 관중들을 매혹시켰으며 실지 생활을 보는것과 같은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역형상으로 세계영화축전에서도 대절찬을 받은 인민배우 오미란, 그의 남다른 재능은 결코 타고난것이 아니였다.

누구도 주목하지 못했던 한 신인배우의 연기에서 새 싹을 찾으시고 창조의 나래를 활짝 펼치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신분은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예술영화 《축포가 오른다》의 주역출연으로 영화창조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은 때로부터 배우의 성장의 걸음마다에는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뜨거운 보살피심이 어려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새로운 역형상을 창조해낼 때마다 연기를 제일 잘한다고 평가해주시며 역형상창조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귀중한 가르치심도 주시였고 그처럼 배우고싶어하던 그의 소원도 헤아리시여 평양영화대학(당시)에서 공부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그후 오미란은 예술영화 《도라지꽃》창조과정에 세련된 연기술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며 제1차 쁠럭불가담 및 기타 발전도상나라들의 평양국제영화축전에서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예술영화 《도라지꽃》은 축전의 최고상인 《홰불》금상을, 주인공역을 한 오미란은 금연기상을 수여받았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가 예술영화 《생의 흔적》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다 영웅적으로 전사한 남편의 뒤를 이어 쌀로써 당을 받들어가는 길에 뚜렷한 생의 자욱을 새겨가는 주인공의 연기형상을 훌륭히 창조하였을 때에는 또다시 배우를 몸가까이 불러주시고 그의 역형상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관객을 마음대로 쥐였다놓았다 하는 간단치 않은 배우, 젊은 녀성배우로서는 대표적인 배우라는 높은 평가를 안겨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깊은 사랑은 그의 가정에도 따사로운 해살로 비쳐들었다.

그의 아버지 오향문으로 말하면 해방전 서울의 한 극단에서 배우생활을 하다가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함께 의용군에 입대하여 공화국의 품에 안긴 때로부터 장군님의 남다른 관심속에 참다운 예술활동으로 빛나는 생의 자욱을 남긴 공화국의 이름있는 배우였다.

장군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부녀를 몸소 가까이 불러주시여 과분한 치하도 안겨주시고 그들의 정치적생명의 보호자가 되여주시여 영화창조의 길에서 빛나는 생의 자욱을 새겨가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이께서는 오미란배우가 군복을 입고 영화예술창조활동에 참가하게 되였을 때에는 군복입은 그의 모습도 보아주시면서 오미란동무의 군복이 몸에 맞지 않는다고, 4. 25예술영화촬영소에 녀성인민배우가 한명밖에 없는데 군복을 잘해입혀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그리고 그가 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인민배우는 아무 사람이나 대신할수 없다시며 나라의 권위있는 의료일군들로 강력한 의료진을 무어주시고 외국의 이름있는 병원에 가서 최상급의 치료를 받고 오도록 해당한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혁명동지를 위해서라면 돌우에도 꽃을 피우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실 그이의 은혜로운 사랑을 불사의 명약으로 안고 병치료를 받고있던 주체91(2002)년 봄 어느날이였다.

오미란은 침상에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예술영화 《생의 흔적》의 속편인 《이어가는 참된 삶》을 만들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그의 가슴은 세찬 흥분으로 높뛰였다.

사실 예술영화 《생의 흔적》의 속편인 《이어가는 참된 삶》으로 말하면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래전에 친히 제목을 달아주시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줄거리까지 밝혀주신 작품이였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 그로서는 더는 침상에 누워만 있을수 없었다.

하여 오미란은 촬영기앞에 다시 나섰다.

불치의 병으로 수술까지 받은 상태에서 한편의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한다는것은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그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기어이 보답하겠다는 불굴의 정신력이 낳은 기적이였다.

그는 모진 동통을 이겨내며 마침내 예술영화 《이어가는 참된 삶》을 완성하고야말았다.

한해도 저물어가던 주체91(2002)년 12월 어느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최근 인민군대에서 인식교양적의의가 큰 좋은 영화들을 잘 만들어내놓고있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인민군4. 25예술영화촬영소에서 만든 예술영화 《이어가는 참된 삶》은 선군시대 영화예술의 본보기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던 장군님께서는 문득 오미란동무가 수술후에 경과가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그를 만나본지가 몇해 잘되였다고 절절한 음성으로 뇌이시였다.

그토록 품들여 명배우로 키워오신 영화예술인, 이 세상 만복을 다 안겨주시며 애지중지 아껴오신 녀배우가 한창나이에 불치의 병에 걸린것이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각별히 마음쓰시는 장군님이시였다.

그때로부터 오미란은 날과 달이 갈수록 뜨겁게 이어지는 은정속에 현대의학의 진단을 거슬러 3년 반이라는 생을 더 연장할수 있었다.

선군령도의 길에서 그의 사망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비통함을 금치 못하시며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인민군4. 25예술영화촬영소 인민배우 오미란이 사망하였는데 참 아까운 배우를 잃었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 영화배우들가운데서 가장 인기있는 배우들중의 한사람이였습니다. 그의 병을 고쳐주려고 많이 노력하였지만 종시 살려내지 못하였습니다.》

주실수 있는 사랑과 믿음을 다 안겨주시고도 그를 잃은것이 너무도 가슴이 아프시여 그리도 애석해하시는 장군님이시였다.

군대와 인민의 사랑과 추억속에 영생하는 예술인들의 빛나는 생은 은혜로운 사랑의 태양의 품속에서만 인간의 재능도 활짝 꽃펴나고 혁명전사들의 값높은 삶도 영원히 이어질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가슴뜨겁게 새겨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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